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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1차 왕자의 난이 손꼽힌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인해 형제간 피를 본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이었다.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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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후의 왕인 공양왕은 서서히 망해가는 고려를 어떻게든 회복시키기 위해 정몽주를 기점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정몽주는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를 탄핵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정치적으로 최대 위기를 맞이했으나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선을 건국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출처. 태종 이방원

문제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늘 곁을 지켜주었던 신덕왕후 강씨가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조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은 반발하였으나 아버지가 아닌 국왕에게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출처. 태종 이방원

당시 신의왕후 한시는 조선을 개국하기 전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들은 신덕왕후 강씨의 권력에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그 이유는 신덕왕후 강 씨가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고, 이성계가 그녀를 지지했기 때문에 모든 권력이 그녀에게 쏠렸다. 또한,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소망하던 아들 이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한다. 

출처. 태종 이방원

하지만 그녀 자신이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이성계 역시 나이가 들어 자리에 눕게 되는데 이 사이 이방원은 형제들과 동지들을 모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남에 따라 가장 먼저 제거대상 1순위에 세자 이방석과 그를 지지하는 정도전, 장지화, 심효생, 남은, 박위 등이 올랐다. 세자 이방석은 17세의 나이로 폐세자가 된 후 동복형인 이방번과 함께 살해되었다. 

출처. 태종 이방원

 

1차 왕자의 난의 결과 조선2개 국왕에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이방과가 즉위하였고, 조정의 모든 실권은 정안군 이방원이 틀어쥐게 되었다. 어린 나이 신덕왕후 강 씨의 정치적 노력으로 조선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이방석은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정종과 태종은 1차 왕자의 난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방석을 서자로 격하시켰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했을 때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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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시대

    춘추시대는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동쪽 뤄양(낙양)으로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03년 전국시대의 성립까지 약 360년 간의 전란 시대를 의미한다. 본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제후국으로 계속되는 성장을 통해 상나라를 대신하여 새로운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중원의 지배자가 된 주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통치제도인 봉건제도를 마련하고, 직할지를 제외한 전국의 영토를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네이버 지도 참고>

 

    특히 주나라는 상나라를 침략을 합리화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명사상'을 마련하였다. '천명사상'은 주나라 사람들이 숭배한 '천'은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천지자연의 법칙을 운행하고 인간사를 제어하고 있는데, 본래 천명을 가지고 있는 은나라는 하날의 신임을 잃어 주나라가 대신하여 천명을 받았다.  

 

 <주나라 문왕(네이버 참고)>

 

    기원전 771년 유목민 견융의 침임으로 유왕이 피살되고 주 왕실은 도읍을 낙양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중원의 제후들은 중원의 정치를 이끌었다. 이때부터 패자라는 개념이 새로이 생겨났다. 이 패자란 제후들을 모아 회맹을 가져 맹주가 되는 것으로 권위가 떨어진 주 왕실에 매년 조공을 바치는 댓가로 천자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감독 및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 묵공>

 

    춘추시대의 명칭은 공자가 저술한 역사서 춘추에서 유래되었다. 일반적으로 춘추시대 이후 시대인 전국시대를 합쳐 춘추전국시대라고도 불리는데, 엄밀히 말해서 춘추와 전국 시대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각 제후국은 주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패자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해 다투었다면 전국시대는 제후국들이 주 왕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통일전쟁을 위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를 의미한다. 

 

<영화 묵공>

 

  • 춘추오패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제후국은 제나라,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있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제후국들이 존재했으며, 패자로서의 지위를 누렸던 강대국을 일반적으로 춘추오패라고 불렀다. 제후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이라고 하는데 회맹의 맹주가 된 패자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 

 

<춘추오패 나무위키 참고>

 

    춘추시대 가장 먼저 패자에 오른 이는 바로 제나라의 환공(기원전 716년 ~ 643년)이다. 제 환공이라고 불리는데 독자들에게는 관포지교로 유명한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두번째 패자는 진나라(晉)의 23대 군주인 문공으로 다른 군주들에 비해 상당히 고생이 많았던 군주로 알려져있다. 세 번째 패자로는 초 장왕으로 즉위 초 방탕스러운 생활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간신을 속아내어 초나라를 강대국으로 이끌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당대 권위가 있는 학자들의 시선에 따라 나눠지는데 오나라의 왕 합려와 월나라의 왕 구천 혹은 진나라 목공과 송나라 양공 그리고 오나라 왕 부차를 꼽기도 한다. 어쨌든 앞서 언급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회맹을 이끌었던 패자를 춘추오패라고 불렀다. 

 

<영화 묵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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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과 단종 그리고 수양대군(세조)] 조선의 6대 국왕 단종은 어떤 인물일까? 우리들에게는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된 이후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비운의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 관상(단종)>

 

단종은 문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 씨이다. 1448년(세종 30) 왕세손에 책봉된 후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문종은 병약하여 왕이 된 지 2년 만에 승하하였다. 

 

<영화 관상(문종)>

 

문종은 왕위에 오른 이래 2년만에 죽었기 때문에 별 업적이 없는 들러리와 같은 왕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문종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 세종이 워낙 넘사벽의 태평성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세종은 약 32년의 재위 기간을 지낸 왕으로 이 기간 동안  문종은 왕세자로서 세종을 도왔다.

 

<영화 관상(문종)>

 

그리고 세종 즉위 말에는 문종이 직접 7년동안 대리청정 기간을 거쳤으며... 실질적으로 세종의 말년 업적은 대부분 문종의 업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문종은 과학적 업적을 많이 쌓았고... 군사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오위진법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다만 세종의 죽음 이후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어린 아들 단종을 남겨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관상(수양대군)>

 

어린 나이에 왕에 오를 단종을 걱정하여 문종은 황보인과 김종서 그리고 정분 등에게 단종을 부탁하였다. 권력을 둘러싸고 김종서 측과 수양대군 측의 충돌 이후 계유정난이 발생하여 수양대군 측이 김종서를 비롯한 단종 측근들을 몰아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어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영화 관상(김종서)>

 

야속한 숙부인 수양대군은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민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저주로 인해 수양대군이 문둥병에 걸리고... 아들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화 관상(수양대군)>

 

단종이 비운의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단종의 생모인 세자빈 권 씨가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만약 세자빈 권 씨가 살아있었다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 관상(단종)>

 

또한 할머니인 소헌왕후 역시 일찍 죽었다. 할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어머니가 살아있는데 반란을 일으켰을까? 명분 부족으로 수양대군을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 이전에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일찍 죽는 사건 역시 없었을 것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조선시대 3년 상은 멀쩡한 사람도 병들게 만들 정도로 힘든 일이라고 하는데... 어머니의 3년 상과 더불어 아버지의 상을 치렀으니... 문종이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영화 관상(세조)>

 

단종은 할아버지인 세종이 매우 감탄을 했을 정도로 무척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김종서의 황표정사의 이미지로 단종이 매우 멍청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단종에게는 확고한 후견인이 없었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이 숙종>

 

같은 예로 숙종의 경우 14살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그를 거스릴 신하들이 없었다. 일단 조선시대 왕들 중 누구보다도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기 때문이고... 특히 눈치를 볼 종친이 없었다는 점이 강력한 왕권을 다질 수 있는 초석이 된 것이다. 또한 대왕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야심 많은 종친이 있었다고 해도 난을 일으킬 꿈을 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 관상(세조)>

 

단종 역시 정통성 부분에서는 꿀리지 않는다. 앞서 이성계가 개국한 이래 왕자의 난으로 둘째 정종이 왕위에 오르고... 이방원이 세제가 되어 3대 왕에... 그리고 첫째 아들 양녕대군의 비행으로 셋째 충녕대군이 4대 왕에 오른다.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후 최초 적장자가 왕에 오른 이가 바로 문종이며... 이어 왕세손이 된 단종은 그야말로 정통성을 가진 왕이 된다. 

 

<영화 관상(단종)>

 

하지만 아무리 정통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받쳐줄 왕실의 확고한 후견인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이 되었고... 결국 왕위를 찬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은 유배를 당하였는데... 강원도 영월쪽에 단종과 관련된 명소가 많이 있다. 

 

<영화 관상(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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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 조선 최초의 세자이자 폐세자 이방석 소개!] 드라마 '나의 나라'가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역사 속 주요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조선 건국의 시초가 되는 태조 이성계, 조선을 안정화시킨 철혈의 군주 태종 이방원,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등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조선 최초의 세자이자 폐세자인 비운의 왕자 이방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드라마 나의 나라>

 

이방석은 이성계의 8남으로 의안 대군이라는 군호가 붙었다.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이 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아버지 이성계가 고려 말 신흥 무장 세력이지만 변방의 소규모 세력에 불과하였다. 이에 중앙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권문 세족과의 연계가 필요한 상황에서 곡산 강 씨 가문과 연을 맺었다. 

 

<드라마 나의 나라>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 든든한 후원 세력이 되어준 강씨의 가문... 그리고 이성계의 오른팔로 정몽주를 제거하면서 개국의 절대적인 공을 세운 이방원... 두 세력은 조선이 개국되면서 서로 견제를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드라마 나의 나라>

 

신덕왕후 강씨는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세자 책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방원 역시 자신의 공이 가장 많기 때문에 세자 책봉에 큰 욕심을 가졌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세자 책봉식이 이뤄지는 날... 이성계는 막내인 이방석을 지목하게 되고... 이는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드라마 나의 나라>

 

하지만 이성계는 단호하였고... 신덕왕후는 정도전, 심효생, 남은 등과 결탁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방원과 형제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도전은 사병혁파라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였고... 결국 이방원과 형제들은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드라마 나의 나라>

 

즉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국의 안정을 위해 사병을 혁파한다는 정책은 결국 이방원과 공신들의 권력을 빼앗는 것과 같았고... 사병을 빼앗기게 되면 제거 1순위인 이방원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방원은 형제들을 규합하여 1차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드라마 나의 나라>

 

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을 뒤로하고... 1392년 8월 11살의 나이로 이방석은 세자로 책봉된다. 당시 개국 공신들은 적장자 계승과 공이 가장 많은 왕자가 세자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태조는 묵살하였죠.

 

<드라마 나의 나라>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그중 가장 유력한 설은 고려의 흔적 지우기로 볼 수 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중앙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유력한 가문과 혼인을 통해 결합하였는데... 이방석을 제외하고는 7남 모두 고려의 유력한 가문과 혼인을 하였다. 반면, 이방석의 경우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고려와의 어떠한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했다는 설이 있다. 

 

<드라마 나의 나라>

 

이외에도 신의왕후와 정도전 등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태조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였기 때문에 고려의 흔적 지우기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찌 되었건 이방석이 세자가 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시국이 안정화된 것으로 보이지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도성 내에 감돌았다. 

 

<드라마 나의 나라>

 

이방석이 어린 나이에 세자에 오른 후 어떤 천부적인 재능으로 포텐을 터뜨렸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재능이 평범했다고 한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제왕학을 학습하여 성인으로 자랐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 이전에 고려 시대 과거에 급제를 한 경력을 가진 이방원의 존재는 그야말로 넘사벽... 

 

<드라마 나의 나라>

 

세자 이방석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신덕왕후 강씨의 죽음으로 볼 수 있다. 신덕왕후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면서... 이성계에게 좌절을 안겨주었고... 또한 정도전과 심효생 등은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잃게 되었다. 

 

<드라마 나의 나라>

 

결국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이방석은 17세의 나이로 폐세자 되었으며... 자객에 의해 형인 방번과 함께 살해당했다. 어린 나이에 세자에 올라 약관의 나이에 이르기 전에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자 이방석... 어른들의 사정으로 죽음을 맞이한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을 듯하다. 

 

<드라마 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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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과 능양군 그리고 광해군의 관계는?] KBS2 월화드라마 '조선로코-녹두전' 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조선로코-녹두전은 미스터리한 과부촌에 여장을 하고 잠입한 '전녹두'와 기생이 되기 싫은 반전 있는 처자 '동동주'의 발칙하고 유쾌한 조선판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광해군의 집권 시기로 인조반정으로 인해 왕권이 교체되는 시기를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로코-녹두전 홈페이지>

 

드라마 속에 등장하고 있는 실존 인물인 영창대군, 능양군 그리고 광해군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만큼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선 가장 먼저 살펴볼 인물은 선조의 14 왕자 중 13번째 왕자이자 유일한 적자(정실부인에게 태어난 아들)인 영창대군이다. 

 

<조선로코-녹두전>

 

조선사회는 적장자의 중심의 승계 사회인만큼 영창대군의 탄생은 당대 임금이었던 선조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 이유는 후궁 출신의 서자로 왕위에 올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통성에 대한 문제는 선조에게 있어 콤플렉스로 남는다. 이러한 와중에 적자가 태어났고... 거기다 막둥이니 얼마나 이 아들이 귀했을까?

 

<징비록>

 

의도치 않은 선조의 아들사랑은 영창대군의 죽음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당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에 휘말린 조선... 선조는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고... 이 과정에서 광해군을 임시로 세자에 책봉하였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광해군의 입지는 선조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높아졌다. 

 

<조선로코-녹두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현 세자인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다만 선조의 수명이 영창대군을 지켜줄만큼 길지 않았고... 약 55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조선로코-녹두전>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의 삶이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종친으로 대우는 받을 수 있지만 역모나 혹은 조금의 꼬투리만 잡히더라도 제거 1순위에 오르기 때문에 납작 업드리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왕자의 삶이 이러할 텐데... 의도하지 않게... 직접 왕위 경쟁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었던 영창대군이 평탄한 삶을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로코-녹두전>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2년만에 칠서의 옥이라고 불리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폐서인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후 다음 해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조선로코-녹두전>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창대군의 죽음에는 광해군이 개입한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영창대군이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드라마 속에는 아사 혹은 증살 된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조선로코-녹두전>

 

어찌 되었건 동생을 죽음으로 몬 광해군... 그 역시 말년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영창대군에 대한 죽음은 조선사회에 있어 그럴 수도 있지...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왕권이 교체되면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해 정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하게 되는데... 어머니에 대한 불효는 후레자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당시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사회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 된다. 

 

<조선로코-녹두전>

 

어미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이 사건을 폐모살제라고 하며... 광해군이 폐위되는데 가장 큰 명분으로 작용한다. 인조반정으로 알려진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옹립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배경하에 드라마 조선로코-녹두전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드라마속에서 능양군(강태오)이 영창대군을 살해한 이야기는 가상의 이야기다.)

 

<조선로코-녹두전>

 

인빈 김씨의 소생인 능양군은 영창대군과 광해군에게는 이종사촌 사이이다. 왕실에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능양군이 칼을 빼 든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복수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우선 능양군의 아버지 정원군은 광해군에게 재산을 압류당해 화병으로 죽고... 동생인 능창군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후 죽음을 맞이하였다. 즉 광해군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셈...

 

<조선로코-녹두전>

 

능양군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성공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당시 집권층이었던 북인 세력을 도륙하였다. 아마 이러한 부분이 드라마 속에서는 광인으로 묘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인조반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일로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지만... 집권 후에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함으로써 두 번의 호란을 겪은 인조에 대해서 무능한 왕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세 인물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조선로코-녹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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